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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PGA -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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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OUNG JOO 골프샵

발자취

  • KLPGA라는 커다란 나무의 시작

    모든 이들이 우러러 보는 높고 푸른 나무. 그 나무도 처음에는 작고 여린 씨앗에 불과했다. 지금은 크고 푸른 나무로 자라나 세계적인 위상을 펼치고 있는 한국여자골프 역시 처음에는 척박한 땅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었다. 한국에서 골프라는 스포츠가, 여자골프는 더욱이 대중화 되지 않았던 시절 그 척박한 땅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운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날 KLPGA라는 나무는 무성히 자라 많은 한국 여자골퍼들을 지켜주고 키워주는 든든한 나무가 되어주고 있다. 그 씨앗을 심고 틔운 사람들. KLPGA 역사의 산 증인인 제1세대 여성골퍼 강춘자와 한명현. 구옥희 그리고 KLPGA 대회장인 김성희가 한국여자골프의 태동기를 이야기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KLPGA의 역사 30년이 곧 자신들의 프로인생 30년이기도 한 그들에게 KLPGA 30주년이 주는 감회는 더욱 새롭다. 모든 일이 엊그제처럼 생생하다는 그들. 30년 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여전히 골프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한 그들이 KLPGA의 창기를 회고한다.

  • 한국최초 여자프로골퍼의 탄생

    1978년 5월 26일은 한국 최초의 여자골퍼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 날이다. 로얄컨트리클럽에서 프로골프협회가 주관한 남자 프로테스트 현장의 한쪽에서 제1회 여자 프로테스트가 따로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이라는 4명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골퍼가 탄생했다. 테스트를 치르는 3일동안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의 스코어가 마지막 홀까지 똑같았으나 마지막 홀에서 강춘자가 버디를 잡아내면서 한국여자프로 1번의 영예를 얻었고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이 차례로 2번부터 4번까지를 차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안종현은 총 74타로 프로테스트를 통과. 이후 "74타 안종현입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다니며 주변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동료가 남기고 간 아련하고도 그리운 추억 한 편이다. 이후 1978년 8월에 김성희, 이귀남, 배성순, 고용학이 추가로 프로 테스트를 통과하며 제1세대 여성골퍼 구성이 완성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 한양컨트리 클럽에서 최초의 여자프로골프선수권대회인 KLPGA 선수권대회가 개최. 한명현이 우승컵을 차지했다. 물론 당시의 여자프로대회란 남자프로대회 안에 여자부를 개설해 이루어지는 형식 이었다.

    당시 척박했던 한국골프시장에서 더욱이 여자프로가 출전할 수 있는 대회는 전무 하다시피 했다. 1978년 KLPGA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979년에는 KLPGA선수권 대회, 삼양오픈, 쾌남오픈 등 여자대회를 개최했고 각각의 대회에서 안종현, 강춘자, 구옥희가 차례로 사이좋게 우승컵을 나눠가졌다. 그 중 1979년 10월에 열린 쾌남오픈에서는 대회 첫날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시합이 취소되어 첫날 성적만을 계산, 구옥희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시대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던 그 때의 일화는 이제는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이 되었다. 남자프로협회는 창립 멤버들에게 있어 여자프로라는 존재를 탄생시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열악한 국내 골프 환경과 남자프로대회에 '셋방살이’를 하듯이 참가해야 했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남자프로대회에서 일부를 나누어 진행된 여자부 대회는 상금과 규모면에서 남자대회의 반도 되지 않았고 1년에 출전할 수 있는 대회수를 다 해 봐야 10개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자프로부 고문이었던 김성희가 각 컨트리클럽에서 여자회원들이 만드는 모임인 월회나 숙녀회 등에서 후원을 받아가며 시합을 얻어야 했던 현실은, 그 현실보다 큰 열정과 재능을 가진 선수들에게 더 큰 무대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일본으로의 진출을 감행한다.

  • 최초의 해외진출과 KLPGA 창설

    야구감독이었던 가네다 쇼지의 초청을 계기로 1982년에 구옥희, 강춘자, 배성순, 안종현, 한명현 등이 일본프로대회에 진출했다. 초청선수 자격으로 대회를 출전하던 중 1983년 상반기 프로테스트에서 한명현이 최초로 일본프로테스트를 통과한 한국여자선수가 되었고, 이어서 1983년 후반기에는 구옥희가, 1984년에는 강춘자가 성적 1위로 프로테스트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일본 활동에 시동을 걸었다. 물론 유창한 일본어 실력도 없이 시작한 일본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타국민이라는 이유로 시합 중에 불합리한 판정을 받기도 했고 김치냄새, 마늘냄새가 난다며 자신들을 피하고 낮춰보는 시선들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던 1984년, 구옥희가 최초로 일본프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구옥희는 그 다음 주에 개최된 대회에서도 우승을 거머쥐며 JLPGA 2주 연속 우승을 기록. 한국여자골프의 자존심을 세웠으며 지금까지 JLPGA 통산 23승 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달성하며 한국여자골퍼들의 해외진출에 석을 마련했다. 구옥희는 일본진출에 이어 미국무대로 그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1984년 일본에서 열린 미국 LPGA시합에서 일본프로 자격으로 참가. 3위를 차지하면서 자신감을 얻어 미국행을 결심한 구옥희는 1985년에 USLPGA 퀄리화잉스쿨을 통과, 1988년에는 USLPGA 스탠더드 레지스터클래식에서 우승하며 한국여자골프의 위상을 드높였다. 또한 1988년은 여자프로부가 남자프로협회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정식으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가 창립된 역사적인 해이다. 1978년 8명이라는 조촐한 회원으로 시작된 여자프로부는 10년 만에 회원수가 50명에 달하는 증가세를 보였고, 그러한 성장에 따라 독립을 하자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여자프로부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남자프로협회 또한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여자프로부의 독립을 지원해주었고, 3,000만 원의 종자돈을 내어주며 여자프로부의 독립에 힘을 실어주었다. 더 큰 성장을 위해 독립을 했지만 창기 여자프로선수들에게 있어 남자프로협회는 지금도 고마운 친정집 같은 존재다. 그렇게 이루어진 KLPGA의 창설은, '최초' 라는 부담감을 어깨에 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골프에 대한 열정을 불태워 온 당시 여자프로부 선수들에게 있어 과거 10년 동안 이룬 땀과 노력의 결실이자 향후 한국여자골프의 발전을 위한 토대였기에, 1988년은 더없이 의미 있는 해였다.

  • 無에서 有를 만들어간 창조의 시대

    한국여자골프의 성장이라는 하나의 꿈을 꾸며 다함께 씨앗을 심고 튼튼한 떡잎을 틔워낸 1978년부터 10여 년의 시간은 KLPGA의 30년 중 가장 열악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정작 그들에게는 힘든 줄도 모르고 그저 열정 하나로 앞으로 나아 간 기억밖에 없다. 또한 최초로 여자프로가 되고, 최초로 해외진출을 하고, 최초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를 창설하는 등, 앞서간 발자국이 없었기에 언제나 최초가 되어 길을 만들어 가야했다. 1970, 1980년대는 無에서 有를 만들어가는, '창조의 시대' 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저 열심히 연습한 기억 밖에 없다는 구옥희.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연습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보니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던 한명현, 골프클럽 풀세트가 없어 하프세트를 빌려서 대회를 다녔는데 샌드웨지가 없어 9번 아이언으로만 벙커샷을 치다보니 어느새 벙커샷의 달인이 되었다던 강춘자, 빈약하던 국내여자대회 개최수를 늘리기 위해서 늘 동분 서주 뛰어다녔다는 김성희…. 회상하자면 끝도 없이 떠오르는 고생의 기억들은 이제는 "그 땐 그랬어." 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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